이름을 붙일 수 없는 세계
깊은 물 속에서 눈을 뜬다. 어둡지만 어쩐지 익숙하고 편안하다. 태어나기 전에 가졌던 기억일까. 몸에 새겨진 감각을 가만히 느껴 본다. 심장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가슴 위에 손을 올려 보지만 조금 다른 리듬이다. 내 가슴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움직이는 소리다. 갑자기 낯선 두려움이 엄습한다. 여기에 누가 더 있는 걸까.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보인다. 여러 개의 다리가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두려움과 익숙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는 서로를 알았던 것도 같다. 당신의 심장이 3개라는 사실을 기억 해 본다. 그러고 보면 오래전에도, 지금도, 우리의 존재는 모두 물속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이윽고 멀리서부터 내려온 빛으로 어둠의 경계가 무너진다. 본 적 없는 색깔들, 끈적끈적한 생명의 흔적이 드러난다. 반짝이고 피어오르고 돋아나는 사이에서 속닥속닥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그들이 쓰는 언어가 궁금해진다. 안다고도 할 수 없고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오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두려움의 골짜기에서
인간은 의도치 않은 오만을 가지고 태어나 그것이 오만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45억년 전 탄생한 지구에 인간이 등장한 것은 겨우 수십 만 년 전인데도, 우리만이 이곳에서 지성을 가진 유일한 동물인 것처럼 여기며 오로지 인간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인간과 동등 한 또다른 생명체라면 외계인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이 다.하지만 지금 이곳에 또 다른 지성의 세계가 있다면,우리는 받아들 일 수 있을까.
아미씨 작가는 생명의 기원을 찾아 바다로 향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낯선 생명체들은 태초부터 바다에서 살아온 원생동물, 즉 단세포 생물 들의 모습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과 작가가 상상한 형태가 섞여 있으나,정보없이는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작가는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관객을 교란하기 위해 더 치밀하게 묘사한다.
어두운 바닷속을 떠돌며 서로 연결되거나 빛을 내며 교류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인간의 신경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나의 기원이 이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구 위의 모든 동물이 바다에서부터 시작했다는사실을 되새긴다. 여전히 전부를 알 수 없는 이거대한 세계에 낯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단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위치가 위협당한다는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Lulu Miller)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1)에서는 유명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의 삶을 탐구한다. 데이비드는 우리 인간이 가장 큰 뇌를 가지지도, 가장 빠르지도 않으며,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만은 아니라는 증거를 충분히 발견했으면서도 그것을 모른 척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 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그가 그토록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혼돈”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니까 밀러에 따르면 우리는 이해와 통제가 불가능한 세상 앞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회오리바람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의지할 만한 표지를 찾는다. 우리 인간이 개미나 별들과 동등한 존재이며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을 수 있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우리를 중요한 자리에 두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고 인간이 더 낫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찾는 이유는 결국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다시 말하자면 두렵기 때문이다. 혹여 다른 존재가 우리의 자리를 위협할까 봐,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고 구분 짓고 그들에게 인간과 다른 언어를 붙인다. 위 책에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고 우위에 서려는 수법을 “언어적 거세”라고 불렀다. 나약한 인간이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위계로 비인간 존재들을 착취하는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해온 일들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구분 짓고 언어를 빼앗는 행위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거나 중요성을 거두기 위해서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아미씨 작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심장이 3개이며 척추동물과 흡사하게 정교한 눈을 가진 존재를 떠올린다. 인간의 600분의 1 크기의 뇌를 가졌지만, 유전자의 개수는 인간보다 1만 개 많은, 인간과 유사한 과정으로 뇌 기능을 발달시키며 여러 개의 다리에 뉴런이 퍼져 있는 이들은 바로 문어와 오징어 같은 두족류다. 우리와 체계가 다를 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두족류는 인간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높은 지능을 가졌다고 알려졌지만, 그러한 판단도 인간의 기준이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준으로 가른다면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나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그려낸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만이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일 것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인간이 애써 쌓아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추락하는 순간이다.
새롭게 발견된 과학적 사실 하나가 기존의 상식을 모두 해체하고 재조립하게 만드는 것처럼, 작가는 우리가 알던 세계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체계의 자리를 만든다. 현실과 허구가 섞인 이미지로 진실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전복하고 새로운 진실을 발견할 가능성을 도모한다. 그 틈에서 인간만이 우월하지 않다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태도를 발견한다.
영화 <컨택트>(2016)에서는 외계의 존재와 소통을 시도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에 성공하자 그동안 알던 시간의 개념과 인지 체계가 달라진다. 존재의 층위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할 때 모든 것이 재편된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시작은 모른다는 전제부터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면 미지의 세계를 헤엄쳐 무언가 발견하는 일은 관객의 몫일 테다.
깊은 바닷속에서 당신을 알기 위해 시작한 이야기가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오랜 시간을 거쳐 쌓인 진화의 서사가 당신과 나 사이를 관통하며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내가 있는 자리가 불분명해진다. 그러나 경계를 무너뜨리고 혼돈을 가져올 때 오히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혼돈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의 정확한 자리가 아니라, 이 경이로운 세계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실뿐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붙여서도 안 되는 세계다.
여전히 혼돈의 소용돌이 속이지만 파도에 몸을 맡겨 본다. 모든 존재가 시작된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아니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니었다. 우리는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눈빛과 손짓을 교환한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언어일지 모른다. 우리가 나누는 이 행위에 이름을 붙일 당신의 언어를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를 휘감는 곡선을 타고 오래전에 시작한 이야기가 흐른다. 비로소 나는 당신의 언어를 듣는다.
김지연(미술비평)